가경제
| 전거유형 | 인물 |
| 대표명 | 가경제 |
| 대등명 | 嘉慶帝 Jiaqing Qing Renzong 가경 |
| 비대표명 | 인종 仁宗 청인종 청 인종 清仁宗 清 仁宗 예황제 睿皇帝 가친왕 옹염 顒琰 아이신 교로 옹염 愛新覺羅 顒琰 Aisin Gioro Yongyan 영염 永琰 아이신 교로 영염 愛新覺羅 永琰 |
| ISNI | 0000000082717478 |
| 생몰일자 | 1760.11.13 ~ 1820.09.02 |
| 생존여부 | 사망 |
| 성별 | 남성 |
| 국적 | 중국(청나라) |
| 본관 | 만주족 아이신기오로 황실 씨족 |
| 직업 | 황제 |
| 주요직책 | 17891113~17960209 가친왕 17960209~18200902 청나라 제7대 황제 |
| 개요 | 1760년 11월 13일 베이징에서 태어난 가경제는 청 제4대 황제 건륭제의 15남으로, 어머니는 효의순황후(위씨)였다. 1773년에 비밀리에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789년에 ‘가친왕(嘉親王)’에 봉해졌다. 1795년 건륭제가 양위 의사를 밝힌 뒤, 1796년 2월 9일 즉위하여 연호를 ‘가경(嘉慶)’으로 정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상왕으로 물러난 건륭제가 1799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행사하였고, 그 직후 부정부패의 상징이던 화신(和珅)을 체포·처벌하여 자살하게 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를 보전하려 하였다. 재정 악화와 군사력 약화를 바로잡고자 검약과 반부패를 내세웠으며, 1796~1804년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는 데 집중하였다. 서남 변방의 묘민 봉기와 동남 연해의 대규모 해적(채견·정일소 등) 문제에도 대응하여 1809~1810년에 걸쳐 강경책과 회유·귀순을 병행하였다. 대외 관계에서는 영국 사절단(암허스트 사절단, 1816)의 ‘궤배’ 거부를 문제 삼아 알현을 불허하고 물러가게 하였는데, 이는 이후 청-영 관계 긴장 심화의 한 배경이 되었다. 학문과 예교를 중시하여 문치(文治) 정비를 도모했으나, 장기화된 내란과 해적 소탕, 관료제의 경직·부패로 국력 회복은 제한적이었다. 1820년 9월 2일 열하(오늘날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행궁)에서 붕어하였고, 서릉(서금릉) 창릉에 장사되었다. 사후 묘호는 인종(仁宗)으로 정해졌다. |

